자리 지키기, 데자뷰

  우리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연습을 한다.

  근래 날이 풀리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젖었다. 예기치 못한 강수는 아니었지만 비는 언제나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모든 걸 흥건하게 만든다. 산책하러 나간다. 비가 내리는 동안 주차되었던 차가 나간 자리는 아직 젖지 않았다.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뀌는 계절 사이에서 우리는 혼란스럽다. 매년 반복되는 봄부터 시작하는 겨울까지이지만. 똑같다고 하기는 어렵다. 계절을 향유하는 기억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없어지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다가오는 낯선 환경에 대해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탓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자리에서는 모두 다르다.


  특정한 장소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기억은 우리를 자리에 뿌리 박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환경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스타나를 빌렸다. 우린 안개가 자욱한 설악산을 넘어 동해로 향했다. 하지만 바다가 보이기도 전에 차 속에서 우리는 라디오를 통해 기자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었다. 태풍 발령주의보. 아버지와 나 그리도 동생이 도착한 해변은 찢어질 것 같은 바람과 비로 범벅이 돼 있었다. 우리는 멀리까지 수고스럽게 떠나온 여정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춥고 흐린 바다에서 물놀이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같이 못 올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아버지에게 처음 수영을 배웠고, 험한 바다에서 물을 첨벙거렸다. 바다를 차는 건지, 아버지를 차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흠뻑 젖은 몸을 수건으로 말리고, 차에서 작은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시트를 다 밀어놓고 앉은 낡은 승합차는 푸근했다. 풍요로운 계절, 밖으로는 비가 창문에 부딪히며 토독토독 소리를 내고, 우리는 얼굴에 닿는 열기 때문에 홍조가 올랐다. 이른 잠자리에 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은 고요했다. 바다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파랗다고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파란 바다를 보면 이전에 본 바다 같다. 유년 시절의 내가 본 바다와는 다른 것들이지만 이미 경험한 것만 같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지켜내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든다. 근심 뒤에 찾아오는 건 휘발되는 추억에 대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찾아올 기시감을 기다린다. 장소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간직하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Editor  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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