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스타나를 빌렸다. 우린 안개가 자욱한 설악산을 넘어 동해로 향했다. 하지만 바다가 보이기도 전에 차 속에서 우리는 라디오를 통해 기자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었다. 태풍 발령주의보. 아버지와 나 그리도 동생이 도착한 해변은 찢어질 것 같은 바람과 비로 범벅이 돼 있었다. 우리는 멀리까지 수고스럽게 떠나온 여정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춥고 흐린 바다에서 물놀이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같이 못 올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아버지에게 처음 수영을 배웠고, 험한 바다에서 물을 첨벙거렸다. 바다를 차는 건지, 아버지를 차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흠뻑 젖은 몸을 수건으로 말리고, 차에서 작은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시트를 다 밀어놓고 앉은 낡은 승합차는 푸근했다. 풍요로운 계절, 밖으로는 비가 창문에 부딪히며 토독토독 소리를 내고, 우리는 얼굴에 닿는 열기 때문에 홍조가 올랐다. 이른 잠자리에 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은 고요했다. 바다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파랗다고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파란 바다를 보면 이전에 본 바다 같다. 유년 시절의 내가 본 바다와는 다른 것들이지만 이미 경험한 것만 같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지켜내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든다. 근심 뒤에 찾아오는 건 휘발되는 추억에 대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찾아올 기시감을 기다린다. 장소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간직하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