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L1ST - 너가 꼭 알았으면 해 ; 함병선(9z)

Track #16. ’너가 꼭 알았으면 해 ; 함병선(9z)’

  ’검은 방 – PRESYNCOPE(실신), Kris Virdonck 크리스 버동크’


  커튼을 젖혀보니 어두운 방이었다. 행여나 발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내레이션 Narration도 함께 나오는 것 같아 비치된 스크립트를 챙겨서 자리를 잡았지만, 조명하나 없는 검은 방에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옆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상이 시작된다.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높은 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시선이 나온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주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이다. 화자는 영어로 말하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을 터이다. 


  많은 풍경들이 지나간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서로에게 양보하는 자동차들, 지나가는 열차까지. 하지만, 저 아래 그 누구도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이렇게 가장 높은 곳에 서있는데 왜 아무도 나를 쳐다봐주지 않는다 말인가. 점점 바닥과 가까워지고 있다. 저 위에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지만 시야는 점점 좁아져 당장 눈앞에 분수대만 보여 이제 끝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게 15분의 여행은 끝이난다.


  크리스 버동크 Kris Verdonck PRESYNCOPE,실신(2010)은 15분간의 생의 여행담을 들려준다. 화자는 이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이와 동시에 화면은 높은 빌딩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옥상에서 시작된 화면이 바닥의 분수대의 물에 거의 닿으면 15분간의 여행은 비로소 멈추게 된다. 


- 대전시립미술관 현대미술기획전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상실 喪失에서 오는 감정은 언제나 힘에 부친다. 이따금씩 표현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고작 상실 喪失이라고 칭하기에는 억울할 때도 있는 듯하다. 단어의 획수조차 그리고 손으로 아프기만 한 단어이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무언가 상실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니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또 잃었다. 지나간 옛사랑도, 어릴 때에 꾸던 대통령이 되겠다던 허무맹랑한 꿈도, 친한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대상이나 방법 또 형태에 구애받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서로의 생각이 닿지 않아서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까지, 상실 喪失 형태는 늘 달랐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까지 참 많은 것들을 상실 喪失 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아프기만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정이라고 무뎌지기 시작한다. 어제는 죽을 만큼 아팠지만 오늘은 견딜만하고 내일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듯하다. 지금도 어쩌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또 하나씩 그렇게 무언가 상실 喪失 하고 있을 테지만, 이제는 그게 아프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상실 喪失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것일까. 어쩐지 이 사실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도 아주 지겹도록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릴 것이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생애는 아마도 많은 상실 喪失들이 놓여 있을 테이니 신의 장난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았으면 한다. 당신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한다. 나 역시도 많은 것들을 잃었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는 만큼 그 자리를 내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대신하고 있기에 그 상실 喪失에 무뎌지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함병선(9z)


  오늘 소개하는 아티스트 함병선(9z)은 밴드 ‘위아더나잇’의 보컬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솔로로서의 활동도 쉬지 않고 이어가는 그의 행보는 언제나 다음을 기다리게 하는 아티스트 중에 하나이다. 밴드 ‘위아더나잇’의 함병선은 우리 그리고 각자의 밤을 노래한다면, 솔로로 활동하는 그는 오롯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지막하게 노래하는 그래서 귀를 기울여 듣게 되는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PLAYL1ST


정규앨범 「Romance」


  지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느껴봤을 상실 喪失. 그 상실 喪失은 사랑에만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아마 가장 처음으로 아팠을 사랑의 상실 喪失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위로이다. 무뎌질 대로 무뎌졌을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프기만 한 이 상실 喪失의 시대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우리들. 그 시대에서 함병선(9z)은 가장 덤덤한 위로의 말을 “나 역시도 사람을 만나 사랑을 했고 또 상실 喪失했다.”라고 그의 음악으로서 전한다. 여러분의 상실 喪失에 그의 노래가 가장 큰 위로로 닿기를 바라며, 그의 말을 빌려 끝을 내보려고 한다.


긴 하루를 보낸 후 그 감정을 담는 일이었다. 

기억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게 참 어려웠고, 

그 기억은 가까워질 듯 멀어져 슬픔인지 행복인지. 

대체 어떤 표정인지 알아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여러 관계를 겪으며 나는 이렇게도 생겨나고 저렇게도 지워졌다. 

모든 곡이 흐른 후, 당신 앞 누군가에게 ‘사랑합니까?'보다는 

‘사랑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궁금해진다면. 

이 앨범은 그 정도면 되겠다 싶다. 


그리고 사랑을 넘어, 사랑을 위한 앨범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외로운 것이 당연하지만.  


2021년 4월. Romance. 

언젠가 주문했던 음식이 이제야 도착했다.  


글 – 함병선 (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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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남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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