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개인전은 30년 가까운 기간을 해외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완성형 작가의 예술실천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담겨있다.
씨알콜렉티브는 2021년 올해의 CR작가로 선정된 신미경의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 Abstract Matters>를 4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개최한다. 작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고,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하여 끊임없이 다른 언어를 탐색하며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간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동시에 자기 복제와 변주의 구분을 명확히 하며 시스템에서 인정받는 수준을 지켜나가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려워도 해내야 하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다. 신미경은 이제껏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분야와 개념인 “추상”을 호명하며 개인의 역사를 되묻는 대담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 Abstract Matters>는 30년 가까운 기간을 해외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완성형 작가의 예술실천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담겨 있다. 작가는 작년 초부터 코로나 19로 록다운(lockdown) 된 영국의 상황에서 온전히 작업실에서만 거주하면서, 번역이 가진 원칙이라는 완벽한 형식적 엄격함을 탈피하고 개념과 내용에 집중한 또 다른 시각언어를 추적하는 작업에 골몰하였다.
신미경은 오랜 유물에서 현대도시건축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일상의 흔적을 재해석하는 인문, 조형, 장르 실험의 결과물인 50여 점의 신작을 생산해냈다. 작가는 오랜 기간 동안 비누라는 매체를 통해 유물과 동시대적인 것을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영국의 헤이워드 갤러리, 대영박물관,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 네델란드의 프린세스호프 미술관,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등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에서 선보였지만, 이번 개인전에서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개념인 추상성을 가지고 조각적인 것, 그리고 회화적인 것, 건축적인 것, 환경적인 것까지 아우르며 응축된 시간과 역사를 탐색한다. 기존 프로젝트가 미술관의 박제된 권력과 제도화된 역사적 산물들을 비누로 번역 · 해체하여 변화하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였다면, 이번 신작은 오랜 건물의 외벽 같은 개인의 삶의 켜를 박제하여 가치를 드러내고, 동시에 작가의 주관적 개입까지 최소화하여 동시대 추상의 아이러니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구상하던 중, 중세의 벽 낙서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오랜 시간 속에 축적된 인간의 흔적들과 시간에 의해 씻겨 내려간 풍화의 자국들, 추상에 대한 정의와 많은 작가의 태도를 연구하며 조각적 재료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추상성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레진(resin)과 플라스터(plaster) 중간 정도 되는 미디움(medium)인 제스모나이트(Jesmonite)라는 새로운 소재에 대한 실험과 함께 건축적 질감에서 영감을 받아 조각적 기법으로 추상회화적인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하며 조각/비조각의 영역에 머물면서도 평면형식을 유지하는 ‘평면 조각’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의 <번역> 시리즈와 같은 작업 방식에서는 나올 수 없었던 즉흥적이고 무의식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제작 과정에서 작가의 개입을 줄이며 다양한 조형 실험으로 작업 맥락을 확장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확대된 이미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폐고무판이나 스티로폼, 유리판 위에 여러 색의 물감을 뿌리고, 제스모나이트에 돌가루, 철가루, 금박, 은박 등을 섞어 수차례에 걸쳐 레이어를 주며 안쪽을 채워나간다. 캐스팅(casting)의 거푸집처럼 사용되는 오래된 고무판의 결이나 마모된 부분, 스티로폼의 표면을 살짝 부식시키거나 상감까지 하면 이곳의 요철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며 판화처럼 표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재료가 굳은 후 고무판 및 판들을 분리해내면 울퉁불퉁한 표면이 드러나는데 우연의 효과가 강조된 결과 이미지는 상상 이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떨어져 나온 표면을 그라인더로 평평하게 갈아내기도 하는데, 노동이 수반된 수고로운 과정을 재료의 성질들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반복하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만족한 결과를 걸러낼 수 있다. 발생하는 우연성은 이미지의 허상(illusion)을 해체하고 익숙한(conventional) 이미지는 평면을 가장한 추상회화가 된다. 작가는 미술사에서의 추상개념과 우연성을 획득하는 다양한 기법 및 재료, 심지어 이미지까지 레퍼런스(reference) 삼아 평면의 외형을 취하지만, 과정은 평판화나 조각 캐스팅과도 같은 아이러니하게도 총체적(holistic) 작품을 생산해낸다. 번역행위에서 해방된 언어는 수많은 레퍼런스를 통해 다양한 미디어와 기법, 그리고 스타일의 변주를 보여준다.
신미경은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물과 예술품을 비누를 이용해 현재의 관점에서 재현하는 작업으로 28년 동안 하루 한시의 쉼 없이 치열하게 작업 활동에 매진, 총 29회의 개인전을 수행했다. 다양한 종교, 역사, 문화적 문맥에 대한 경험을 도자기와 불상 형상의 비누 조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통해, 어떠한 “절대적 가치”에 대하여 23년 동안 질문을 해왔다. 처음에는 서양 고전의 돌 조각과 비누 사이의 시각적 유사성을 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이방인의 시각, 즉 후기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비누와 대리석의 영구성과 비영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성질에 관심을 가지고, 비누로 서양 고전시대의 상징적인 조각을 만들었고, 한발 더 나아가 박물관이란 시스템이 보존하는 유물들에 관심을 가지며 ‘유물이 되게 하기’와 ‘번역’이란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한때는 장식품, 숭배물이거나 일상용품이었던 어떤 것이 유물로 결정되어 박물관의 선반에 올라가는 순간, 그 물체의 시간은 정지하고, 기능도 잃어버리며, 오직 유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지점에 천착하였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이러한 과거의 작업들과 상반되는 지점에서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밀접하게 관계하면서, 추상이라는 문제를 통해 기존작업과 차별화된 또 다른 원칙과 양식의 해방을 획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비누로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번역> 시리즈, <유령> 시리즈, <화장실 프로젝트>, <풍화 프로젝트>, <비누에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 <폐허 풍경>, <화석화된 시간>, <페인팅> 시리즈)를 선보였지만, 재료 자체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바, 세라믹과 유리 작업을 계속 연구해왔다. 2019년에는 런던 바라캇 갤러리에서 도자작업, 《풍화》로 개인전을 가졌다. 이번 2021년 서울 씨알콜렉티브에서의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 Abstract Matters》가 매체의 다변화 탐구와 함께 또 다른 시각언어로의 진화, 경계를 실험하는 진일보한 확장을 위한 플랫폼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확대된 이미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추상에 대한 것은 미술사를 통해 오랫동안 탐험 되어 온 것으로, 작가에게 추상은 진리를 탐색하거나 상세한 서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성취되어야 할 일정 목표 또는 재서술 되어야 할 문제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점을 드러내는 것은 신미경 작업 세계만의 고유한 특징이고, 동시에 오랫동안 반복된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완전한 새로움 또는 본질 탐구에 기댄 작업이라기보다 익숙한 결과에서도 과정을 해체하여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것이 이제껏 작가가 치열하게 매진해온 노정의 의미이며 태도다. 이번 작업의 형식과 내용이 고대 벽화에서부터 주변의 오래된 건물의 외벽을 닮았다고 느껴진다면 그래서 동시에 수많은 추상 이미지들이 떠올려진다면, 이미 추상은 특수한 스타일의 전유물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이미 어디에나 있는 것이자 일상 가까이 있는 개념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은 ‘추상은 이미 모든 삶과 언어에 걸쳐있는 개념으로 특정 작가나 비평가의 특수한 담론으로 차별화하는 추상표현주의자들과 미니멀리스트들에 대한 기존 담론들을 재전유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지점’과는 일정 거리를 둔다. 또한 조각/비조각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확장된 조각영역을 증빙하려는 지점과도 거리를 둔다. 이러한 전략 및 사회문화적 차이와 정치와 권력의 개입 너머의 순전한 시간과 환경 속 개인/개별자의 역사 그리고 불순한 의도나 작가의 개입에서 다소 자유로워지는 곳에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해체의 전략이 드러나는 동시대적 의미의 추구가 강하다 하겠다.
신미경은 작가로서의 존재 이유는 ‘기존에 있었던 것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태도를 위해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아 나가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존재, 그리고 예술 하는 방식이다. 그의 행보와 실천들이 한결같이 자만이나 합리화, 지침이나 뒤돌아봄 없이 30년 가까이 꾸준하게 한곳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시일정 : 2021.4.13(화) – 5.29(토)
전시장소 : CR Collective 씨알콜렉티브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 120 일심빌딩 2층)
오프닝리셉션 : 코로나19의 여파로 리셉션 없이 전시를 진행합니다.
공식 홈페이지 : cr-collective.co.kr
문의 : 02)333-0022 / 010-9525-5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