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의 벽이 무너지는 날

  아르 브뤼트(프랑스어 art brut)를 정신 병원의 환자나 죄수가 그린 무의식적인 양상의 그림이라고 보는 측면이 있다. 다른 방향으로 보면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미술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시즌에는 조금 더 순수한 방향의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통적이면서 체계적이지 못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혹은 대중문화에 반하는 서브컬처적인 텍스트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순수가 있을 것이다. 순수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엘리트주의와 가식을 덜어낸 내적 충동에서부터 일어난 예술. 우리가 가질 시간이다.

  빌 트레일러는 목화솜 농장에서 노예신분으로 태어났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는 소작인으로 평생을 보내게 된다. 농장주인이 죽게 되고 도시로 떠난 그는 80세의 나이에 노숙자가 된다. 빌 트레일러가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글을 모르던 빌 트레일러는 버려진 골판지와 연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1939년 한 청년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곤 그를 지원해주었다. 청년의 제안으로 전시회를 열었지만 유행하고 있던 추상주의와 표현주의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세계 2차대전의 발발로 청년은 떠났고 빌 트레일러는 다시 노숙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95세의 나이로 그는 수 많은 그림을 남기고 작고했다.


  빌 트레일러의 그림에는 순수라는 말을 쉽게 꺼내기 어렵다. 분류로서의 언어인 '순수'로 카테고리화를 시킬 수 있겠지만, 그의 그림에는 어딘가 묘하게 불안하고 슬픈 감정이 투과되어 다가온다.


  다른 그의 그림에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보다 큰 동물의 모습을 통해서 과거 흑인 노예의 삶에서부터 오는 불안정함이 엄습한다. 그의 화법은 생각보다 담담하고 투박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겠다. 골판지를 주워 그림을 그리던 그의 주름진 얼굴과 굳은 살 박힌 손이 떠오른다.

  세상을 나는 것처럼 빌 트레일러의 그림 속의 인물은 떠있다. 오브젝트 위가 아닌 공중에 있는 인물은 어떻게 보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일 수도, 혹은 하늘을 나는 걸 지도 모르겠다. 땅으로 떨어지는 삶은 아찔하다. 잡으려고 노력해도 잡을 수 없는 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놓친 물은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누구에게나 슬픈 바다가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감에 쉽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었던' 것이 되고야 만다. 빌 트레일러의 그림은 원초적인 분노에 대한 그림을 그렸을 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다가오는 순수의 힘은 있다.

  늙은 노인의 골몰하는 손과 우물거리는 입을 상상한다. 쉽게 휘어지고 마는 오래된 종이의 질감. 주위를 둘러싼 도시의 소음 가운데에서 위 아래로 움직이는 연필. 종이를 스치는 흑심과 손날의 소리. 어디선가 바람은 불어온다. 털이 휘날리고 종이가 펄럭인다. 앞에 누워있는 검은 고양이는 자신을 그리고 있는 이를 쳐다본다. 고양이는 도망가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보며 있었던 고양이를 상상한다. 꾸준한 힘은 우리에게 미래를 선물한다. 현재 겪고 있는 우리의 불안 또한 미래에 다가서면 관조할 힘이 생길까 싶다.


Editor  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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