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려 붙인 네모의 세계, 퍼비스 영

  젊은 시절, 퍼비스 영(Purvis Young, 1943-2010)은 플로리다 주립 교도소에서 주거 침입으로 복역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고갱, 피카소 등의 작품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조차 나오지 않은 그는 마이애미를 대표하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가 되었다. 은행 명세서, 청구서, 메모와 같은 종이에 수천 개의 작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장바구니에 보관하고 다니며 거리에서 주은 잡지에 붙여 보관하곤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퍼비스 영은 마이애미 거리에 자신의 작품을 이어 붙여나가길 시작했다. 때로는 액자에, 나무 판자에 그려진 그림은. 균일한 캔버스의 사각형 보다는 조금 더 일그러진 느낌이 든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벽화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에 참여하기도 하며 미국의 스트리트, 그래피티 아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네모는 다른 행성을 표방한다. 퍼비스 영의 상상 속에 떠오르는 부유물을 판자 속에 가둔다. 때로는 나무 판자로, 어쩔 때는 버려진 카펫을 찢어 경계선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림을 넣어둔다.퍼비스 영은 손에 닿는 어떤 오브제이건 미술의 재료로 삼았다. 그를 보고 사람들은 '다작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찍어낸다.'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수가 노래를 많이 부르고, 작가가 글을 계속 쓰듯이 화가는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뿐인데, 나에게 자꾸 작품의 수가 많다고 하면,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일관된 카테고리의 대상을 그리던 그는 그 중에 말을 사랑했다.  


"나는 항상 말, 야생마를 그리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나에게 말은 자유를 상징한다."


  그는 농구, 말, 임산부, 바다, 길거리의 사람들과 같은 좋아하는 주제를 몇 번이고 그려냈다. 때로는 단일한 주제를 대하며 수백 개 이상이 그려져 있는 책을 엮어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그는 전쟁, 대공황, 아메리카 원주민의 갈등과 투쟁에 대한 다큐를 보며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발견한 나무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벽에서 '사라지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조금 더 그릴 수 있는 것. 자신의 자유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한다. 스스로의 행성을 네모 안에 넣는다. 누군가의 네모가 아닌 자신 만의 네모를 사랑하는 일. 퍼비스 영의 그림에서 만나보자.


Editor  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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