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전주에 도착하지 못한 당신께

  

마침내 우리는 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시네필들의 달력에서 5월을 다시 되찾았다는 뜻이다.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차다. 영화광들에게 5월은 전주를 가리키는 하나의 기호였기에. 하지만 작년의 전주국제영화제는 그 지명이 무색했다.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 온라인 상영과 장기 순회 상영으로 영화제가 개최되었지만, 그곳은 전주가 아니었다. 영화가 끝난 곳엔 가맥집도, 막걸리 골목도, 한옥 거리도 없었다. 영화를 함께 논할 이름 모를 이들과 옅은 유대감도 없었다. 마치 2020년의 5월은 영화광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전주로 향할 수 없었다.


  Film Goes On. 올해 전주 영화제의 슬로건은 ‘여전히’ 영화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비록 전체 객석의 3분의 1만이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전주는 관객들을 다시 그들의 공간으로 초대했다. 영화의 거리 중심부에 있는 시간표는 붉은 매진 스티커로 가득했다. 전주의 5월은 우리가 알던 그때의 풍광을 점차 회복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고, 문득 필자는 미처 함께하지 못한 3분의 2를 생각해본다. 아직 전주에 다다르지 못한 당신들에게, 21년도의 5월을 기록할 필요를 느낀다. 혹시라도 우리가 내년 5월엔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르기에.


  여기 당신이 함께 볼 수도 있었던 좋은 영화들을 각 섹션 별로 골라보려 한다. 몇 편은 조만간 스크린에서 조우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올해의 전주가 그려진다면, 당장 22년의 5월을 비워놓고 기대해보는 건 어떨까?

스페셜 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


<워터멜론 우먼> Dir. 셰럴 두녜이


  올해 전주의 특별 프로그램 ‘인디펜던트 우먼’은 남성 중심의 영화사가 아닌, 독립적으로 자취를 개척한 여성들의 계보를 조망한다. 기획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영화 한 편을 꼽는다면, 단연 아프리카계 미국 레즈비언으로 최초의 장편 영화를 만든 셰렬 두녜이의 <워터멜론 우먼>이다. 그녀는 1930-40년대 할리우드에서 전형적인 흑인 유모를 연기했던 ‘워터멜론 우먼’의 자취를 좇으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어떤 사료도 남기지 않는다. 존재 부정의 역사를 살아온 그녀는 매우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그들 앞에 도전장을 내민다. 스스로가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것. <워터멜론 우먼>은 영화 스스로가 존재함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한국 단편 경쟁


<불모지> Dir. 이탁


  단편은 장편과 다른 매력이 있다. 짧은 러닝타임으로부터 에너지를 응축시켜야 하는 고도의 밀도가 요구된다. 당신이 올해 전주에서 한국 단편 경쟁 부분을 관람했다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을 것이다. 이탁의 <불모지>는 강렬한 영화다. 먹고 자는 삶을 위한 터전이자, 죽은 육신이 마지막으로 누울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토지 위에 재개발의 허상이 드리우는 1980년대 서울의 근교에서 벌어진 하나의 죽음을 서늘하게 담아낸다. 생으로 가득하던 농촌에 한탕에 대한 욕망이 드리울 때, 역설적이게도 땅을 디딘 모든 존재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 영화의 기이한 에너지는 40여 년 전의 일을 소환했음에도 여전히 토지의 욕망이란 공포가 현시대에 통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감독의 이름을 보다 명확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월드 시네마


<애플> Dir. 크리스코스 니코우


  올해 전주의 월드 시네마 섹션은 특별 기획전인 ‘스포츠는 여성의 것’과 일반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스포츠에 대하여 통쾌한 일갈을 날리는 <동양의 마녀들>이나 <서핑하는 여자들>은 단연 특별 기획전의 히트작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두 편의 영화도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월드 시네마 일반 부분에서는, 낯선 그리스 감독을 만날 수 있다. 크리스코스 니코우의 <애플>은 지구상에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처럼 퍼진다는 독특한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걸 잊은 주인공 ‘알리스’는 오로지 한 입 베어 문 사과의 감각만이 선명하다. <애플>은 망각을 다루는 여타 영화가 기억의 흔적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감각의 문제로 풀어내어 끝내 상흔을 마주하게 한다. ‘결함을 잊는 삶은 온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당신을 끌고 갈 <애플>은 5월 26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동일한 질문 앞에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ditor  최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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