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들

표류하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들

-2018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의문의 라이텍> 리뷰


  기억은 때때로 왜곡되거나, 조작되고, 지워지고, 어쩔 땐 사실이 되었다가, 거짓이 된 채 부유한다. 기억이 집단의 것인지, 개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억은 매순간 변화하면서 시기, 문화에 따라 재맥락화됨을 반복한다. 이러한 담론과 관련하여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아시아포커스 전에서 선보였던 <의문의 라이텍>은 ‘라이텍’이라는 한 인물로 대유하여 역사와 기억, 그 사이의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의문의 라이텍>은 1939년부터 1946년까지 말레이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라이텍에 관한 작품이다. 라이텍은 프랑스, 영국, 일본군의 삼중 스파이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공연이 시작하면 끊임없이 커튼이 걷히는 영상이 투사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의 형상이라기엔 조금 커 보이는 무언가가 무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무대 상단에 있는 스크린의 자막과 함께 목소리가 들리고, 라이텍에 대한 자전적인 독백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라이텍은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무수한 ‘나’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라이텍을 기억한다. 내부자와 외부자, 사실과 거짓, 스파이 활동과 정보원, 혁명가와 배신 등을 넘나들며 라이텍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은 뒤엉킨다. 이내 뒤엉킨 기억들은 라이텍이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많은 이들의 입을 거쳐 온 이야기들을 통해 라이텍은 극장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무수한 ‘나’들의 증언을 토대로 라이텍에 대한 역사가 선택되고, 편집되고, 재서술 된다. 파편의 형태의 ‘라이텍들’을 기반으로 라이텍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라이텍의 형상은 조명, 영상 같은 빛으로 인해 마치 환영처럼 보인다. 유령 같은 라이텍의 모습은 “이름없는 인간”과 “이름없는 강” 같은 것.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지 않았던 그는 이따금 흘러간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기억에 의해서, 글로 인해서. “모든 줄거리는 하나로 수렴되고, 하나의 필연에 수렴된다.” 라이텍을 다루는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1947년 3월에 질식사, 사고로 죽었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남들에 의해서 말해지는 라이텍일 뿐이다. “기만의 시대가 낳았”다고 본인을 인식하는 라이텍의 몸은 정치의 판도에 의해서 관념 속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자아가 붕괴되어 그의 형상까지 흐릿하고 안개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텍이 본인을 직접 서술하기 위해 투쟁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라이텍의 흐릿한 형상은 호추니엔이 역사 속의 개인을 재현해내기 위한 투쟁의 방식처럼 보인다.


   작가 호추니엔(Ho Tzu Nyen)은 탈식민화,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했던 동남아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변해야 했던 라이텍은 한국 소설의 인물인 ‘꺼삐딴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극의 후반부에 치닫을수록 역사의 전환점에서 라이텍은 자신을 위해 선택했을 뿐임이 드러난다. 역사와 기억에 대한 담론은 줄곧 이야기되어왔던 예술의 소재이다. 작가 호추니엔은 라이텍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억을 말하면서도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라이텍을 진정 기억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작가는 불완전한 기억을 재현 불가능하다고 상정하고,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기억들과 얽힌 라이텍의 이야기를 그저 극장이란 공간에서 관객에게 전달하며 감각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거대한 ‘역사’는 개인의 일상과 관련된 ‘역사’에 의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연극은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잊힌 것들을 다시 그것을 무대로 끌어들이고, 발화하게끔 하는 장치이다. 기억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의문의 라이텍>은 라이텍이라는 한 개인의 미시서사와 서구의 제국주의의 거시서사를 맞물리게 하고 역사와 기억을 활성화시킨다.


Editor  정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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