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L1ST#41. '취향의 역사'

  눈을 뜨고 일어나니 12월입니다. 시간은 늘 무엇이 그렇게 급한 건지, 영월할 것만 같던 순간들도 이제는 내 마음속에 빛이 바랜 사진 한 장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난 날이 아쉽다는 이유만으로 붙잡아 두지는 않기로 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앞으로 어떤 장면이 내게 어떻게 남을지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동시에 나이가 듦을 의미합니다. 불과 엊그제까지는 풋풋하고 마냥 어렸던 스물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서른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났군요. 같은 시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음, 우선 지금의 삶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글쓰기'를 삶의 방식으로 염두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서점의 베스트셀러들을 가끔씩 사서 읽는 그런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어쩌면 이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일 수도 있겠습니다.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분명해진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일종의 기준 혹은 규칙들이 생겨납니다. 한눈에 척하고 보면, 혹은 옷깃만 스쳐도 안다고 할까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적인 느낌들이 바로 그 판단의 근거입니다. 이 기준은 모든 것들에 적용 됩니다. 사람, 음악, 영화, 여행 등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예의는 없습니다.(아, 그렇다고 제가 그런 고리타분한 편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취향趣向'이라고 부릅니다. 취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어떤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나름의 내 기준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기준으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또, 취향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나의 경우는 '좋아하는 색깔'입니다. 무채색만 고집하던 제가 녹색을 사랑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리고 한 가지만 평생 좋아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것도 좋아하고 또 저것도 좋아하고, 온 세상천지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라면 그것도 꽤 성공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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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PLAYL1ST플레이리스트는 그런 저의 '취향의 역사'입니다. 일종의 제 음악 취향의 연대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순서는 10대, 20대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어떤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또 지금은 어떤 음악들을 즐겨 듣는지 같이 한 번 살펴보죠.


1. 10대의 저는 지독한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팬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힙합이라는 장르에는 두 개의 Scene 씬이 존재했는데, 메이저와 언더그라운드로 나뉘어서 부르고는 했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것을 찾아서 듣게 된 장르가 바로 언더그라운드 힙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힙합을 듣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가리온.' MC메타와 나찰로 이루어진 힙합 듀오로 지금 힙합 씬을 이끄는 베테랑들의 우상과도 같은 이들은 당시에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상징 그리고 뿌리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 활동하는 래퍼들도 이따금씩 가사에서 Shout out샤라웃을 할 정도이니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가리온을 시작으로 저의 국힙(국내힙합)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드렁큰 타이거, 버벌진트, 소울컴퍼니, 다이나믹 듀오, 빈지노, 일리네어 레코즈 그리고 지금의 힙합 씬을 이끄는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크루, 레이블까지. 힙합은 그렇게 강산이 바뀌는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 국힙을 좋아하는 제게도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 LATTE IS HOUSE


1. 드렁큰타이거 -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버벌진트 - Overclass

3. MC 스나이퍼 - BK Love

4. 피타입 - 힙합다운 힙합

5. 소울컴퍼니 - 아에이오우 어!?

6. 에픽하이 - Open M.I.C

7. 가리온 - 소문의 거리

8. 키네틱플로우 - 몽환의 숲(feat. 이루마)

9. 더 콰이엇 - 진흙 속에서 피는 꽃(feat. Kebee, MC Meta)

10. 랍티미스트 - Dear.unknown(feat.Wimpy)

11. 다이나믹 듀오 - 동전한닢

12. 팔로알토 -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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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대는 변화와 수용의 시기입니다. 음악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아니지만, 감히 저의 '음악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가 등장합니다. 그곳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대전에 위치한 '갠지스의 바람'(이하 갠지스)이라는 곳인데, 오로지 국힙만 골라서 듣던 제게 갠지스는 수많은 다른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제게는 아주 뜻깊은 곳입니다. Queen, Oasis, Nirvana, Coldplay 같은 아주 상징적인 밴드부터 Bob Dylan, The Carpenters, Billy Joel 등 시대를 노래한 올드팝, 그리고 김광석, 김현식 산울림 등 내 어머니가 즐겨 듣던 노래들과 재즈, 얼터너티브, 크로스오버 등등. 일단 그곳에 가면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들이 넘쳐났기에 새벽이 아침이 되는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음악에 또 술과 사람들에 취해 F.U.N의 'We Are Young'을 목청껏 부르며 그 시절을 보냈던 아주 소중한 기억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듣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고 해야 할까요? '아, 나는 그런 음악 별로야.' 같은 원색적인 대답보다는 '같이 한 번 들어볼까?'와 같은 조금은 다른 혜안을 그곳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2 GOLDEN DAYS


1. David Bowie - Space Oddity

2. The Beatles - Hey Jude

3. John Denver - Take Me Home, Country Roads

4. Billy Joel - Piano Man

5. 산울림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6. Nirvana - Smells Like Teen Spirit

7. Oasis - Champagne Supernova

8. Buena Vista Social Club - Chan Chan

9. 이상은 - 둥글게

10. 빛과 소금 - 내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11. Breakbot - One Out Of Two(feat. Irfane)

12. Michael Jackson - Love Never Felt So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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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래서 지금입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화두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자주 듣는 그 기괴하고 이상한 음악들이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어머니의 질문이었습니다.) 꼭 그런 음악들만 골라서 듣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플레이리스트를 가만히 살펴보니 꽤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더군요. 음, 글쎄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 내 마음속에는 상실과 결핍, 공허함, 외로움 같은 것들이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모른 채로 살았으면 더 나을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는 나 자신을 그런 감정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매일 아주 즐겁습니다. 적당히 술을 마시고, 신이 나면 춤을 추고, 슬플 때는 노래를 부르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단지, 그 감정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쓰려는 것뿐입니다. 제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면의 소리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가끔은 그 일이 벅차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사는 편이 내게는 분명 더 좋은 일이기에 오늘도 나는 그 소리와 닮은 음악들을 들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대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3 INWARDS


1. Ryuichi Sakamoto - Happy End

2. 방백 - 심정

3. 김창완 - 시간

4. 사뮈 - 우리의 시간이 같은 시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

5. 도마 -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6. 강아솔 - 아름다웠지, 우리

7. 김오키, 히피는 집시였다 - 서로를 바라보며 죽여버림

8. Beirut - Gallipoli

9. 정재형 - Andante

10. Dakota Suite, Quentin Sirjacq - Kyoshu

11. 겸 - 우린 마를리 없었지



  여러분들은 어떤 취향의 역사를 가지고 계시나요? 내가 가진 취향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고, 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괜히 감추려고 할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취향만큼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뻔뻔해져도 좋습니다. 취향이 원래 그런 거죠 뭘. 한가지만 고집해 봐도 좋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것저것 세상 모든 것을 좋아해도, 또 지극히 개인적이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분명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아주 근사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바로 나 자신. 그럼 오늘도 내일도 취향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Editor  김남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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