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집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 돌아왔다. 표지 예쁜 책 몇 번 들었다 놨다, 괜히 표지만 들춰보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가운데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한 책 두 권을 꼽았다. 일과 개인 그리고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을이 되길 바라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유난히 우중충한 여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코로나19도 한 몫 했고. 폭염과 장마 속에 쌓인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서점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녹음 짙은 표지를 발견했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을 만났다. 2020년의 여름은 찰랑거리는 바다도, 시원한 산이나 숲도 아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한 권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숲의 화장터’ 스케치는 완성되기 십 년 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입구 부근에 십자가가 아니라 오벨리스크가 세워질 계획이었다. 오벨리스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숲의 예배당’을 위한 스케치에 아스플룬드가 써 넣은 말은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였다. ‘나’와 ‘당신’은 언제 바뀐 것일까?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비채, 2016, p.188
소설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사카니시는 존경하던 무라이 선생님의 무라이 건축사무소에 입사한다. 화려한 건축 트렌드에서 벗어나 소박하면서 명확한 목소리를 내는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일원이 되고 국립현대도사관 설계 경합 참여를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여름 별장으로 향한다. 함께 식탁을 차리고, 연필을 깎고, 설계를 하고, 때때로 불을 쬐며 오가는 대화와 풍경들은 매순간 고요하게 다가온다.
한여름의 날씨 같은 사카니시의 청춘만큼이나 건축가라는 직업 역시 매력적으로 읽힌다. 건축가는 건축물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물리적 공간을 만드는 직업 규정된다. 하지만 소설 속 그들의 시선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 이상으로 섬세하게 뻗어나간다. 이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닿는다. 그들이 책상과 의자가 앉아 이루는 선에서 시작해 이후 시대에 관리될 방법까지.
그림이나 사진, 조형물처럼 시각적 측면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오로지 문장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한 채의 도서관이 설계되기까지의 과정과 경합,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담아냈다. 여름을 닮은 문장들은 때로는 찬란하고, 때로는 서늘하다.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구성원들은 여름 별장에 머물며 건축가로서의 철학과 개인으로서의 고민을 나눈다. 사카니시를 비롯한 인물들 개개인의 건축 철학이 그들의 삶 사이사이로 스미는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이 소설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필요할 것이다. 건축물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궁금하다면, 진솔한 목소리로 그려지는 자연, 사람, 건축을 느끼고 싶다면, 일상과 조금 다른 풍경이 필요하다면.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장류진의 소설들은 소중하다. 우선은 재밌고, 그다음으로는 경쾌하다. 「잘 살겠습니다」부터 「탐페레 공항」까지 단편 소설들은 지금의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감각을 일깨운다. 일과 나, 타인과 나, 타인과 일 사이의 연결고리가 그려진다. 산뜻한 문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만큼만, 우리가 느끼는 만큼만 괜히 느끼한 해석 없이 보여준다. 그저 불합리한 대로, 씁쓸한 대로.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다양한 직업이 등장한다. 일상에서 주목받을 만한 특수한 직업들이 아니다. 나의 직업이기도 하고, 너의 직업이기도 한, 오랜만에 지인들과 모여 술마시다보면 한 명에게 하나 씩 할당될 법한 그런 일들.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는 꿈이다. 월세를 내고, 통신비를 내고, 공과금을 낼만큼 일하면 되는 순환이 시작된다. 특별한 영감을 주는 순환이 아니다. 보편선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긍정 또는 부정의 영역이 아니며 최소한의 삶을 위한 생존의 영역으로 그려진다. 조금 더 내다본다면 「도움의 손길」에서처럼 아이 없이 여유로울 정도의 생존. 하지만 센스가 없으면 내가 먼저 목덜미를 물리는 것은 여전하다. 장류진이 다루는 ‘일’을 읽다보면 일하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내내 발붙이고 있는 현실도.
아니, 지금 장난해?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들어왔던 유리문에 거꾸로 적혀 있는 글자를 다시 읽었다. TAKE OUT 시 아메리카노 2,000원. 그래, 어디에도 ‘아이스’ 라는 말은 없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이 되어 따져 물었다.
장류진,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창비, 2019, p.170~171
생활밀착형 슬픔들이 있다. 4대 보험, 포괄임금제, 확정일자, 전입신고. 한자만으로 이루어진 관공서 단어들의 어려움, 작은 자취방에 앉아 물티슈로 바다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집어낼 때의 감정. 작은 슬픔들을 헤아리다 보면 스스로 작아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픔에서 비롯되는 슬픔은 눈물 한 번 흘리면 되지만, 사소한 슬픔은 뭔가 표현하기에도 민망하다. 너무나 일상적인 생활의 순간들이기에. 장류진 소설들의 슬픔은 이런 포인트와 유사하다. 나는 어떤 태도로 직장을 다녔고, 어떻게 그만두었는가. 나의 일에는 어떤 슬픔이 존재했는가. 돌아보면 살짝 민망한 그런.
장류진의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럼에도 화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슬픔도 존재하고 기쁨도 존재하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화해에서 찾는다. 사소한 슬픔의 무게만큼 선 넘지 않는 위안이 되는 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