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아쉬워하지 못하곤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미처 알지 못했거나. 못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귀결될 수 있을까. 결국 기억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길이 끊기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이 반복되지 않는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시간 속에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예지동은 현재 '세운 4구역' 재개발이 시동된 공간으로 이전의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진 않다.
공간이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가능할까. 재개발이 진행되고 새로운 보도블럭이 깔 리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들이 들어찬 공간은 '이전의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인가. 그렇다 면 '이전의 모든 것'은 무엇으로 엮여 추상적인 시간적 개념 속에서 통용될 수 있을까. 종종 찾는 예지동은 방문할 때마다 한 가게 씩 문을 닫곤 한다. 지난 주에는 분명 있었 던 조명 상가의 빛들이 오늘은 밤이 찾아온 것처럼 어둡다. 사람의 손이 거친 공간은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나려 해봐도 손길이 남아있다. '이전의 모든 것'은 '현재의 폐기물'이 되어 길을 메운다.
예지동은 건물의 정문과 후문을 통해서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 폐허의 공간은 아니다. 분명히 길을 닦는 손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움직이는 손들은 공간을 무대로 만든다. 관객이 떠나고 난 뒤에 무대라고 이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공연을 위해 무수히 많은 손들은 바닥을 닦고 풀어진 커텐 줄을 조이고, 조명을 설치한다. 때로는 한 명의 관객도 오지 않는 상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손들은 여전히 움직인다. 언젠가 찾아올 관객을 위해서 말이다. 잊혀지지 않으려는 손들은 누구보다 투박하고 손금의 심도가 짙다.
예지동 시계 골목에는 사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벽에는 무수한 실외기가 붙어 있고 그것은 손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시간은 손들이 견디기에 강력하다. 거센 파도 앞에 서 있는 어린 아이처럼 무력해지고는 한다. 강풍으로 인해 찢어진 돛은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의도치 않는 여행을 떠난다.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심지어 깊은 바다까지 잠수를 마치고 남극까지 갈 수 있다. 어디 까지나 의도치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여행은 꽤 큰 여독을 부여한다. 예지동의 소상공인들은 가판대를 가게 앞에 펼쳐놓고 계속해서 일을 한다. 손이 쉬지 않고 특정한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1의 손은 시계를 만지고 2의 손은 카메라 렌즈를 닦는다. 3의 손은 미처 주인을 찾지 못한 캠코더의 바디를 살펴본다. 멀리서 커피와 음료들을 가득 실은 카트가 등장한다. 손들은 골목과 골목에서 모여 티타임을 가진다. 티타임이라는 달콤함에 빠져 오랜 여독을 풀 수만은 없다. 손들은 나왔던 골목으로 다시 돌아가 사물을 만진다.
예지동 "세기사" 사장님의 손
"코로나 이후로 우리 뿐 아니라 소상공인들은 모두 지쳐있다. 찾아오는 손님이 확연히 줄었다." 오래된 것은 종종 삐그덕거린다. 오래되고 낡아서가 아닌 관리를 못해준 내 손 탓이다. 풀려버린 나사를 조이고 먼지를 불어내면 다시 힘을 받아 걸을 준비를 마칠 수 있다. 예지동 시계 골목의 초입에는 "세기사"라는 카메라 수리점이 있다. "약 43년 정도 카메라를 만졌다. 카메라가 좋았고 어렸을 때부터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필름 카메라는 사라지고 잊혀질 것들을 오래전부터 담아 왔다. 손에서 손으로 1의 손에서 2의 손으로 넘겨지고 넘겨진 카메라들은 한 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골목에는 시간을 담아줄 카메라도 존재해왔다. 닫힌 문과 문. 무너지는 벽과 벽 사이에서 지키고자 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길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예지동의 벽은 내일도 손들이 들어찰 것이다.
시간을 판매하는 길 초입의 시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시간은 흐르고 있다.
손은 하루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닦고 조인다. 밤이 오면 내일을 위해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다. 늘 보이는 청계천의 느티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늘 손이 본 느티나무는 내일 볼 느티나무와 다를 것이다. 내일의 느티나무는 어제보 다 더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단단해진 채로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손은 내일 아침 다시 예지동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라지고 잊혀진 것들은 한 곳으로 다시 모인다. 그곳에서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손은 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