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코앞으로 왔습니다. 어쩌면 겨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씩은 계절을 계산적으로 정확히 알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겨울이야!’라든지 ‘사흘 밤이 지나면 무더운 여름이 시작 될 거야.’ 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있는 편리함을 꿈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계절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대도 분명히 덜할 것이며 ‘언제 계절이 바뀌었지?, 벌써 겨울이다.’라고 말하는 놀라움도 없어질 것입니다. 나는 사실 겨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 김없이 추운 날씨가 돌아오면 귀찮음이라는 것이 몸과 마음을 차지해 나태해지기 십상이고, 추운 날씨를 싫어하는 탓에 외출도 잘 하지 않게 되는 겨울은 제게 그런 계절입니다. 그래도 겨울이 오면 꼭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는 겁니다. 겨울이 펼쳐진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눈 덮인 백사장과 그곳을 걷는 주인공들의 겨울 옷차림 그리고 여자주인공의 대사 한 마디, ‘Meet me in Montauk.’ 언젠가 나를 스쳐지나간 문장들이 생각이 납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에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예요. 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망한 것을 사과할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당신의 많은 부분들. 한숨을 내쉬지 않고는 열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