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행복을 누리기 어려운 시국이다. 아르바이트마저 경력자를 원하는 상황에서 물질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점점 작아지기만 한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다. 퇴근길이면 유난히 음식 냄새에 약해진다. 좋은 곳은 어찌나 많이들 다니는지. STUSSY 40주년 재킷을 사고 싶지만 할부에 허덕일 미래가 보인다.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들면서 괜히 주눅 들게 된다. 쓸데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만 늘어난다. 명백한 현대인이라 자기 존재만으로 평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소소한 소비가 필요하다. 임시방편에 불과할지라도 지금을 진정시킬만한 그런 소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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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O minifigures』 - 4,900원
레고는 최고의 선물이다. 어린이날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스무 살 생일에도 레고를 받고 싶었다. 블록과 블록을 맞추다보면 작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기분이었고, 완성 이후에 찾아오는 성취감도 충분했다. 레고의 끝은 역시 피규어. 해적부터 우주인까지 종족도, 직업도, 인종도 다양한 레고 피규어는 언제나 수집욕구를 자극했다. 어쨌든 작고 귀엽다. 책상에 올려두면 꽤 산뜻하다. 굳이 한 시리즈를 전부 모으지 않아도 괜찮다. 한 달에 한 번 쯤 구매하다보면 어느새 늘어있는 피규어 무리를 볼 수 있다. 공간을 차지하는 수집품도 아니고, 애지중지 관리를 요하지도 않는다. ‘지나가다 보이면’ 사기 좋은 제품이다. 시리즈마다 16개의 모델로 이루어져있으며 개별 포장, 미스터리 팩 방식으로 판매된다. 기존 레고 제품에선 볼 수 없는 피규어가 들어있다. 중고거래도 활발한 편이라 인기 있는 피규어를 리셀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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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수미(Say Sue Me) Your Book / Good People 7" Vinyl』 - 13,500원
인디 록에 관심이 많은 리스너라면 절대 지나치지 않을 세이수미의 바이닐이다. 세이수미는 픽시스(Pixies)나 페이브먼트(Pavement), 요 라 텡고(Yo La Tengo)와 닮았다. 부서지는 사운드 속에서 발견하는 유머와 해방감. 그리고 사려 깊은 마음. 억지로 꾸며낸 로-파이가 아닌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난 로-파이. 누군가의 젊음 한순간을 도려낸 듯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고개가 들썩거린다. 영원히 날 것으로 남을 것만 같은 음악 앞에선 중2스럽다는 얘길 들어도 괜찮다. 그런 작은 기분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기분에는 기준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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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사 쏜살문고 시리즈』 - 9,800 ~ 10,800원
113x188 사이즈(cm)로 작은 가방에도 넣기 좋은 판본이다. 에세이부터 소설,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글이 담겨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기 좋은 두께, 적당한 가격, 감각적인 표지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시리즈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작가의 원하는 작품만 골라서 구매하기 좋다. 인상적이었던 시리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시리즈. 시리즈의 표지들처럼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관능적인 인상의 작품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선명하게 반영된 시대상과 재치 넘치는 대화들을 읽다보면 지하철 2호선 반 바퀴쯤은 순식간이다. 무라카미 류의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적합하다. 그의 작가 생활과 쇼핑이 글로 직조되는 방식은 느끼한 구석 하나 없이 담백하다. 한 두 페이지 정도로 툭툭 던져지는 무라카미 류의 쇼핑기를 읽다보면 문득 나의 쇼핑기를 쓰고 싶어진다. 북디자이너 이기준의 산뜻한 산문집 『저, 죄송한데요』와 디자이너 이지원의 공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에세이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는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이쯤이면 취향에 맞춰 소소하게 즐기기 좋은 시리즈인 게 분명하다.
소소한 것은 어디에나 있다. ‘부러운 것들’이 가져다주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하리보 젤리도 괜찮고, 즉석복권도 괜찮다. 다만 괜한 후회와 현자타임은 금물. 잠깐 주어지는 소소한 순간에 집중해야한다. 그냥 그렇게 지내면서 크게 지를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