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ARTING POINT OF LIKING

취향의 시작점

  취향의 시작을 헤아려본다. 읽는 소설의, 듣는 음악의, 보는 만화의 처음을 찾다보면 꽤 달았던 오래 전의 기억에 도착한다. 취향 이전에 흥미였고, 쌓이는 흥미만큼 세계가 넓어졌다. 솎아내기가 필요했다. 예상치 못한 변덕 때문에 과감히 제외하는 것들도 생겨났다. 남은 것들을 묶다 보면 이걸 취향이라고 하는 건가, 조금 어설픈 아카이브가 쌓여갔다. 모난 부분이 있어도 괜찮다. 언제나 텍스트와 사운드 몇 개가 주춧돌처럼 단단히 나의 취향을 지켜주니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 J. K. 롤링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합법 판타지였다. 베스트셀러라는 명목은 지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 독서를 요구했던 부모님 앞에서도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무엇이든 읽기를 좋아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유치한 (아동용) 일러스트가 아닌 오직 텍스트로 상상력을 자극했다.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은 현실과 허구 사이쯤에 나를 머물게 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나에겐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했던 셈이다. 당시 생긴 독서 습관은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또래와 어울리는 것은 힘들어도 책을 잡고 앉아있는 시간은 수월했다. 그리고 그냥 그런대로 성인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공들여 텍스트를 읽고, 이야기를 쓰고 있다. 마법을 믿진 않는다. 하지만 종종 마법 같은 일들은 일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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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 Heart』 - 자우림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은 20년이 넘는 시간 속에도 시들지 않았다. 대학가요제 무대를 통해 처음 자우림을 만났다. 록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김윤아의 보컬은 내가 알던 밴드의 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인생 첫 음반으로 자우림의 『Purple Heart』를 골랐다. 자우림의 소리가 좋았다. 사춘기를 통과하며 조금씩 자우림의 가사들을 이해했다. 대부분의 앨범에 지난 기억들이 붙어있다. 이벤트 당첨으로 친필 사인 음반을 받았던 날을 기억한다. 누군가와 함께 흥얼거렸던 ‘팬이야’를 기억하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들었던 ‘애인 발견!!!’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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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킹』 - 타케이 히로유키

 

  왜 하필 『샤먼킹』이었을까. 좋아하는 만화 리스트에서 꼽자면 『샤먼킹』은 앞보다 중간쯤에서 찾는 것이 빠른데. 그냥 종종 생각나는 정도. 손에 들려있는 닭꼬치와 블라인드 사이로 햇볕이 부서지는 창가. 나의 첫 소년 만화는 시내 서점 바로 옆에 붙은 만화방에서 시작됐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부모님 없는 첫 외출에 나선 날이었다. 잠깐 주어진 시간 동안 뭐라도 읽어야 했다. 바로 보이는 것이 『샤먼킹』이었고, 읽는 내내 굉장히 즐거웠다. 완결은 언제 봤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드디어 다 봤네’ 쯤의 기분이었다. 『샤먼킹』이후로 나는 소년 만화에 매료됐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일명 ‘원나블’의 시대를 고스란히 겪었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드래곤볼』에 빠졌다. 성장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응원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없는 용기를 통해 현실을 살아갈 용기를 만든다. 『헌터×헌터』의 완결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샤먼킹』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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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움츠러든다. 첫째가 세련됨이고 둘째가 힙함인 세상에서 홀로 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즐겨온 것들을 감춘다. 새로운 관심사를 가져보자고 낯선 공간과 물건에 정을 붙여본다. 그것도 잠깐 다시 어설픈 아카이브로 돌아온다. 나와 닮은 형상의 취향 앞에 선다. 익숙한 마음으로 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Editor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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